숲에 이는 바람
다들 무사한 여름 보내고 계신가요? 몇 주간 가혹한 폭염으로 야외활동을 해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온열사고가 잇따르는 반면, 도심 실내는 차갑고 건조한 에어컨 공기로 가득한 날들이었지요. 입추가 지나면서는 몸을 감싸는 공기가 한결 선선해져 한숨 놓입니다. 매해 가속화되는 기후 위기는 일상을 어떤 모습으로까지 바꾸어놓을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변화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그려보게 되어요.
농부의 숲 프로젝트는 자연과 농부의 삶이 지속될 수 있는 건강한 환경,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생태계를 회복시키는 농업 모델을 제시합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10년 뒤, 그리고 그 너머를 그리면서요. 시작은 막연했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어렴풋한 희망과 기대감이 생겨납니다.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자, 훗날 돌아보면 더욱 의미 있는 발자국일 거라는 생각 또한 점점 더 짙어지고요.
오늘의 편지는 올해 초, 숲작업자 활동을 제안받았던 날로부터 상반기 활동들을 되짚은 연지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연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투명한 길을 더듬더듬 짚으며 한 걸음씩 떼는 일”을 지속하는 여정을 세밀하게 담아냈어요. 조곤조곤하면서도 분명한 글투와 말투가 놀랍도록 닮은 숲작업자 연지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읽어주셔도 좋겠습니다.
/ 숲작업자의 편지 편집자 혜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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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바라보고 시작하지만 사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요.”
서늘한 봄밤. 멀리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다정한 상대는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명료하게 말을 이어갔다. “10년 정도 시간이 흐르고 뒤돌아봤을 때야, 아 우리가 이런 길을 걸어왔구나. 알 수 있는 일인지도 몰라요.”
분명한 목소리 덕일까. 수화기 너머로 들은 이야기 가운데, 모호한 문장이 가장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불투명한 길을 더듬더듬 짚으며 한 걸음씩 떼는 일. 시간이 흘러 소복한 걸음이 쌓이면 다시 뒤를 돌아 발자국을 헤아려야 비로소 드러나는 길. ‘농부의 숲’이라고 했다.
숲. 수웁. 수웊.
나는 새처럼 그 단어를 물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떤 말은 입안에 갇히지만 어떤 말은 자꾸 달아난다. 작은 바람을 일으키며. 숲을 발음할 때면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야 하는데, 그때 혀끝과 앞니 사이에 작은 공간이 생긴다. 그리고 그 공간의 크기만큼 바람이 입 밖으로 빠져나간다. 크게 말하든 작게 말하든 필연적으로 바람이 인다. 내 안에 갇히지 않고 작은 바람이 되어 날아가는 기분이 좋아 천천히 길게 발음했다.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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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숲작업자라는 이름으로 만나 농가를 다니며 그곳에 펼쳐진 땅과 생명을 탐색하는 시간을 보냈다. 새로운 농장에서 농부님을 만날 적이면 서로 소개하기도 했다. 농부의 숲은요. 숲작업자들은요. 때로는 아리송한 표정들. 가히 숲이라는 것이 거대하고 울창하여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는지 명확히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과연 숲을 한 문장으로 단순화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구석구석 훑고 지나가야만 전해지는 것도 있으니까. 아무튼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 말을 덧대고 더듬거리며 어렴풋한 이미지를 그려가는 과정이 좋았다. 언어 이전의 세계, 혹은 새로운 세계의 언어가 태동하는 과정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어느 봄엔 *벌새클럽(농부의 숲 시민모임)을 따라 충남 홍성의 한 언덕에 나무를 심기도 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삽으로 땅에 구덩이를 판 뒤 어린 묘목을 심고 주변에 물을 진탕 뿌려 흙을 반죽하는 작업이었다.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쓰며 흙을 뒤적여 반죽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는데, 나무 심기를 마치고 바라본 풍경은 아름답고도 귀여웠다. 들판에는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꼬챙이처럼 얇은 묘목들이 듬성듬성 꽂혀있었기 때문이다. 듬직한 나무의 태초의 모습은 이렇다니. 새삼 놀라웠다. 그간 알아보지 못한 거리의 어린 묘목들에게 드는 미안함과 대견함. 존경. 그리고 애틋한 사랑스러움. 너희들이 오래도록 자라 숲을 이루는구나.
유월에 다녀온 충주 수안보의 *작은알자스에선 삽목으로 나무를 키우셨다고 한다. 짤동한 나뭇가지를 물통에 꽂아 얇은 뿌리가 내리면 그를 땅에 옮겨 심어 진정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돌보셨다고. 무려 10년 동안. 그렇게 손에 잡히는 것 없이 눈에 띄는 것 없이 긴 호흡으로 더디게 자란 나무와 그들을 바지런히 돌보며 숲을 이루는 사람들을 보았다.
* 벌새클럽 | 농부의 숲 시민 커뮤니티. 충남 홍성 채소생활 농가행 후기(클릭) * 작은알자스 농가행 편지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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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콩농장 」 부단히 뿌리내리는 나무들
벚꽃을 좋아하지만 벚나무 피는 계절이면 늘 농사일이 바빠 멀리 가지 못하는 농부님. 그는 벚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나무를 밭의 둘레에 심으셨다고 한다. 아득한 미래의 어느 봄날, 땅을 향해 고개 숙인 농부님을 으라차차! 일으켜 웃음 짓게 할 여린 분홍 꽃을 떠올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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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지를 준비하며 나무 이름을 다시 여쭤보았다. 벚나무에 핀 꽃사진을 함께 보내주신 마콩농장 농부님의 메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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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두농장 」 밭의 테두리를 따라 자라는 나무들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나무들은 계수나무. 심은 지 4년 정도 되었어요. 회초리 같았는데 많이 컸죠. 먹을거리가 아니어서 망설였지만 계수나무는 수형이 아름답고 단풍이 근사해서, 조만간 멋진 풍경이 되어주길 기다리고 있어요.
계수나무 옆으론 쥐똥나무가 보이고요. 사이사이엔 수국과 철쭉이 숨어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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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밤. 수화기 너머로 건네온 다정한 물음을 떠올린다. 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함께해보지 않겠느냐고.
기뻤다. 안도감이었을까. 나는 종종 자원이 고갈된 황량한 미래를 그리고 마는데.. 어쩌면 그곳에 숲이 존재할 거란 안도였을지도. 보이지 않는 것은 마땅히 두려움을 동반하기에, 두려움을 고백하며 그것을 두 팔 벌려 끌어안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분명한 미래를 만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들은 숲을 만들 것이다. 우리가 발 디딘 세상이, 켜켜이 쌓인 역사가, 오랜 시간에 걸쳐 그렇게 이룩된 것처럼.
더욱이 작은 입소리. 입을 오므려 소리 내는 것만으로도 바람을 일으키는 숲이 아니던가. 어떤 일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바람 길은 바람이 지나간 뒤에 드러나듯, 모래의 굴곡진 흔적을 통해. 나뭇잎이 일렁이는 모양으로. 파도가 굽이치는 물결로. 거세게 퍼붓는 여름 장맛비의 스러짐을 통해서. ‘아, 바람이 일었구나-.’
그들이 걸어간 먼 미래의 숲엔 바람이 깃들 것이다. 고독하고 아름답게- 벌새의 날갯짓처럼 부지런히 다정했던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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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지 원고를 몇 번이나 정독했는지 모릅니다. 감동의 글이었어요. 다른 숲작업자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농부의 숲 프로젝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기는듯해요. '10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일'이라는 말도 자주 생각했습니다.
이번 그림편지는 숲을 이루는 나무와 풀, 산을 초록으로, 밭에서 여물어가는 채소와 과일들은 보라색으로 표현했어요. 나무를 심고 돌보는 과정을 통해 점점 숲이 되어가는 모습을 담아보았습니다.
/ 숲작업자 이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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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시장 마르쉐는 13년 동안 시장에서 농부를 만나고, 먹거리를 나누며 작은 농부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습니다.
하지만 기후위기로 폭염과 집중호우가 반복되고, 빠르게 생산하는 방식의 농업은 흙의 힘과 생물다양성을 점점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좋은 농사를 지으려 애써도 농부의 삶을 오래 이어가기 어려운 현실 또한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농부의 숲은 이러한 시대 속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과일나무와 여러해살이 작물, 산나물과 허브 등을 함께 심고 돌보며 숲처럼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농업을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나무는 뜨거운 볕과 바람으로부터 밭을 지켜주고, 풀과 꽃은 벌과 나비 같은 작은 생명들이 다시 찾아오는 환경을 만듭니다. 흙은 천천히 회복되고, 농부의 밭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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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농부의 숲에서는 572그루의 나무와 8,000촉 이상의 다년생 식물이 농부들의 밭에 심어졌습니다. 올해 2026년에는 50여 명의 벌새클럽, 프로보노, 숲작업자, 벗밭이 이 여정에 함께하며, 농부 혼자서는 가기 어려운 길을 천천히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 마르쉐 | 인스타그램 / 웹사이트
농부시장 마르쉐는 전국 곳곳의 소규모 농부, 요리사, 수공예가가 함께 모여 먹거리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대화하는 농부시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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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작업자의 편지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농부의 숲 프로젝트 또는 숲작업자들에게 궁금한 점, 의견이나 응원을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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